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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출판사

   머구리
 
   저자/역자 : 이완우 작가/문학박사 (문화체육부 문학부분 우수도서)선정
   출판일 : 2011.08
   페이지 : 288 ISBN : 85622783
   판형 : 신국판  
   정가 : 10,000원
 
 
해당도서 분류바로가기 : 비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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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완우 작가<머구리>는 소설을 향한 내 애정의 표시인 동시에, 오랫동안 집요하게 공존해온 채무 같은 자신의 알량한 가책에 대한 이기적인 변명이며, 바닷속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머구리들을 위한 작은 노래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완우 작가는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으며, 추계예술대 대학원에서 문예창작 박사 학위를 받았고, 문학세계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뒤 단편소설 , <신처용가>, <물의 나라> 장편소설 <진지왕의 진지한 스캔들> 등을 발표한 작가이다.

이 소설에 대한 추계예술대 김다은 교수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거짓 절망하면서 다른 평범한 인간들과 혼동되지 않으려는 자들이 아니라 철저하게 절망하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려하지만, 살면 살수록 더 이상 평범하지 않은 자들이 되고 더욱 더 절망하게 되는 자들이라며, 이는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표현처럼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의 피곤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감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며, 아름다운 것,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 뒤에 숨어서 한다고 말한다. <편집자주>





목차


작가의 말·5

프롤로그·11

너는 학교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19

출항·73

검은 시거리가 비치면·127

춤추는 바다·179

고풀이·233

에필로그·273

작품해설·279



이 완 우 약력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으며

추계예술대 대학원에서 문예창작 박사 학위를 받았고

문학세계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뒤

단편소설 , <신처용가>, <물의 나라>

장편소설 <진지왕의 진지한 스캔들> 등을 발표했다.






서평




아름다운 것 뒤에 숨어사는 괴물 ‘머구리’



김 다 은 (소설가 / 추계예술대 교수)



머구리가 뭐지?



주춤하게 만드는 소설 제목이 있다. 첫 페이지를 열어보기 전에 제목이 이미 독자들의 호기심을 낚거나 유쾌한 상념을 만들어내는 경우이다. 소설 ‘머구리’ 초고를 받아들었을 때가 그랬다. 도대체 머구리가 무엇일까? 물론 소설 목차나 첫 페이지를 들여다보면 눈치 빠르게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러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제목 앞에서 상상의 유혹에 빠졌다. 머구리는 어쩌면 너구리 비슷한 어떤 동물이름이거나 머루와 비슷한 열매 이름일지도 모르고, 아니 멍텅구리 정도의 어떤 인간형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닐까? 이런 긴 상념은, 제목이 머구리의 실체를 가능한 빨리 파악하려는 지적 호기심보다는 그 실체를 알아가는 과정을 즐기고 싶은 상상의 호기심을 더 자극했기 때문에 생겨났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설가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 ’라는 소설 제목 앞에서 ‘싱아’가 무엇인지 의문에 사로잡힌 이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싱아’는 어린 시절 들판에서 찾아먹던 식용 풀의 이름인데, 소설은 그 식물을 통해 기억저편에 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프루스트의 주인공이 마들렌느 과자를 베어 무는 순간에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되찾는 것처럼 말이다. ‘머구리’는 ‘싱아’와는 반대로 어린이를 어른으로 탈바꿈시키는 사건이나 매개의 표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설가 이 씨가 작가의 말에서 밝힌 것처럼, 그는 죽은 익사체를 보기 전까지 “내 젊은 시절의 바다는 무한한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 익사체는 그의 동경의 대상을 현실적인 삶의 전투장으로 달리 인식하게 해준다. 마찬가지로 소설 주인공인 소년은 바다와 하나로 일치된 동심 상태에 있다가 죽음을 통해 바다와 분리되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버지가 일하던 바다. 소년네 삶을 지켜주던 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꾸 눈물이 나와서,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어서 소년은 눈에 힘을 주었다. (p . 37).” 즉 작가의 표현대로 그들은 ”그 사건을 계기로 어쩌면 어른이 되고 말았는지도 모르겠다.”

소설가 이 씨는 ‘작가의 말’에서 머구리는 바다 속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며 살아가는 잠수부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실제 소설 속 머구리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잠수부나 해녀의 모습이 아니다. 머리에는 청동투구를 쓰고, 몸에는 사람들이 입혀주어야 겨우 입을 수 있는 잠수복에 납덩어리를 채우고, 발에도 쇳덩어리를 찬, 말 그대로 죄수의 모습이 따로 없다. 지옥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벌을 받은 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처럼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은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말처럼 순진함의 유혹을 벗고 어쩌면 “죄인이 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르트르가 말한 의미에서 우리는 개인이 되도록 선고 받았던 것이다.





아름다운 것 뒤에 있는 숨어사는 머구리



소년에서 어른으로의 이행은 소설가 이 씨나 주인공 동식에게는 죽음과 함께 찾아온다. 그것도 바다로 인한 죽음이다. 소설가 이 씨에게 바다는 “고된 삶에 지친 인간을 쉬게 해주던 장소”였고 주인공 동식에게는 아버지가 대형문어를 잡아 올리던 보물섬 같은 바다였으나, 그들은 죽음을 통해 바다라는 아름다운 얼굴 뒤에 숨어 있는 무서운 괴물 같은 존재를 파악하게 된다.

소설가는 아름다운 바다가 어떻게 현실의 바다 혹은 머구리의 바다로 변해가는지 철저하게 해부해간다. 소설의 첫 부분부터 고기잡이를 나온 배들의 인공적인 불빛이 온통 바다를 뒤덮는다. 소설의 주인공 동식은 동식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는 ‘소년’으로 나중에 머구리가 되었을 때는 ‘젊은 사내’로 대부분 모습을 드러낸다. ‘소년’은 아버지를 바다에서 잃은 후 처음으로 바다가 지니는 아름다움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소설가와 소설 주인공이 거의 동일한 체험으로 바다의 실체를 파악했음을 알 수 있다.



“포구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멀리서만 바라보던 구름 너머에 있던 섬이었다. 한번 들어간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섬이었다. 그 섬에는 용이 산다고도 했고 무서운 바다 괴물이 산다고도 했다. 바다에 나간 어부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모두 조섬에 사는 괴물이 잡아간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혹시 아버지도 섬에 산다는 바다 괴물에게 잡혀 간 것일까? (p. 38)



어린 소년의 이런 심적 두려움 외에도, 아버지의 친구인 큰 아제의 말을 통해서도 비슷한 내용의 고백이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바다에 삶의 터전을 둔 사람들은 진정 바다의 본성을 파악하는 순간을 저마다 겪고 마는 것이다. 큰 아제의 말은 ‘소년’의 두려움을 거의 반복하듯 설명하고 있다.



“바다가 무서워 보이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늘 뒹굴던 놀이터인데도 말이야. 풍요로운 삶의 터전이었던 바다였는데. 손을 쓸 수도 없었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제 목숨 하나 건지기 바빠 눈앞에서 사라져가는 핏줄이나 다름없는 친구를……바다가 싫어졌어. 온갖 고생 끝에 마련한 목숨 같은 배를 바다에 바쳤을 때도 그렇지는 않았었어…그래도 나는 바다를 떠날 수는 없었지. 동무만을 남겨 놓은 채 홀로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어. 이를 물로 버텨야 했네……그 바다에서 나는 밤마다 바다의 절류를 들으며 술을 마시는 게 고작이었지만. (p. 80)



아버지를 바다에서 잃은 소년의 고통은 육지로 이어지고 심화된다. ‘작은 아제’의 어머니에 대한 관심 때문에 어머니는 마을에서 쫓겨날 처지가 되고, 어머니는 온갖 학대를 당하다가‘소년’을 데리고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어머니는 여인숙 일층 구석방에 달세를 든다. ‘소년’은 주인노파가 차려주는‘손주같은 놈 밥 한 끼’로 항상 끼니를 때우고, 어머니는 같은 여인숙에 투숙하는 박 사장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의 꼬임에 빠져 가진 것을 모두 잃는다. 그 후 어머니가 낯선 자와 여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소년’은 학교에 가지도 않고 여인숙으로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 후 그의 학원 강사로서의 생활이나 결혼생활은 일인자와 이인자의 싸움 혹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싸움의 연속이었다. 이런 육지의 삶에 진저리를 치다가 결국, 그는 다시 바닷가로 돌아온다.



“다시 이곳으로 오게 된 특별한……무슨 이유 같은 거라도 있는가? ”

“아버지가 그리워서입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서린 곳이어서입니다. 아직도 바다 속 어딘가를 떠돌아다닐 아버지를 혼자 놓아 둘 수가 없어서입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셨는데요……아버지의 소원대로 선생님이 되지 못한 건 죄송하지만 아마 아버지도 저를 보시면 잘 왔다고 말씀하실 거예요……아닙니다. 아니에요. 다 거짓말입니다. 사실은, 사실은요 아재,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어서예요. 사람들하고 경쟁하면서 사는 것도 힘들고, 어머니를 보는 것도 힘들고, 가족을 부양하는 것도 힘들고……그런데 왜 그렇게 바다에 들어가는 것이 힘들던지요. 아버지처럼 살겠다고 왔는데 왜 그렇게 바다에 들어가는 게 힘들던지요. 아마 아버지의 흔적을 만날까봐……두려워서였겠지요. 이제 아버지처럼 살 겁니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 바다에서, 욕심 없이 아버지를 지키며 살겠습니다. (p. 87)



동식은 결국 아버지처럼 머구리가 된다. 소설가 이 씨는 머구리가 현대적인 장비 없이 어떤 상태로 바다의 일을 하는지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변 사람이 “잠수복을 마주 잡고 있”으면, 머구리는“두 사람이 잡고 있는 잠수복에 한쪽 다리를 집어”넣고 그리고 다시 “나머지 다리”를 집어넣는다.“잠수복을 추슬러 머리 위까지 올려” “잠수복을 두 번 접어 목에 감싼 다음 그 위에다 청동 투구와 연결될 압착장비를 고정”시킨다. “그런 다음 어깨 앞뒤로 무게가 이십 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납덩이를 채”운다. 그 뿐이 아니다. “십 킬로그램이 넘는 쇳덩이”가 바로 신발처럼 발에 꿰어진다. 그리고 “청녹이 슨 낡은 청동 투구를” “얼굴에 씌”운다. 그리고 “난간으로”가서 “알루미늄 사다리”를 타고 바다로 내려간다. “망태와 쇠갈퀴를” 가지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세상과 연결된 하나의 끈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바다는 동경과 휴식의 바다가 아니라 머구리의 바다이다. 아주 어둡고 고요함에 갇힌 세계이다. “절망과 평온을 뒤섞어 놓은 것 같은 어둠”의 세계이고,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 속에서 처음으로 느꼈던 캄캄하던 어둠과 어머니의 절망, 세상살이의 고달픔에서 어김없이 공존하던 좌절”의 공간이다.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되는 일”의 공간이고, “조금이라도 서두르면 뼈와 살이 괴사되는 잠수병에 걸릴 수도 있”는 공간이다. 그곳은 벗어날 수 없는 공간이지만 그렇다고 결코 강요된 공간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동식은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다. 오히려 친근하기까지 했다. 아무도 없는 세상,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사십 미터 바다 속 어둠의 세상. 지금 이 순간만은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어머니에 대한 애증과 아내 그리고 삶……아버지도 혼자만의 세상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p. 94)



바다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것은 강인함을 의미하는 말이긴 했다. 속을 예측할 수 없는 바다에서 평생을 견디어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다를 이겨 낸다기보다 바다에 적응한다는 표현이 옳을 정도로 때로는 자연을 극복할 힘을 지녀야 하고 때로는 자연의 순리를 따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강인함이었다.(p. 187)



소설가 이 씨는 “머구리는 산소를 공급해 주는 줄 하나에 의지해 삼사십 미터 바다 속에서 목숨을 걸고 작업을 한다. 그래서 공기 줄을 잡은 사람과의 호흡이 매우 중요하다. 조금만 공기 줄이 엉키기라도 하면 머구리의 목숨은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 ‘줄 하나’에 대한 언급은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생명줄처럼 중요한 부분이다.

소설 등장인물들의 관계만 봐도 그렇다. 아버지의 친구는 ‘큰 아재’ 그리고 나이가 젊은 동네 청년은 ‘작은 아재’, 그리고 동네 사람들은 이름이 있다 해도 ‘봉두 아재’나 ‘삼수 아재’처럼 친척 혹은 지인처럼 모두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마치 줄 하나로 서로 얽혀 있는 한 가족과 거의 유사하다. 이는 단순히 혈연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물 밖에서 공기 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나 물 안에서 고기나 해산물을 따서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가게 해주는 사람이나 이들은 서로의 생명의 줄을 쥐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서로 위로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서로 완전하게 화합하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 것은 그들의 본성 때문이라기보다 삶의 본성 때문이다.



그 청동투구를 쓰면 서로 대화를 주고받을 수도 없다. (p. 26)



그들의 대화는 창동투구를 사이에 두고 하는 대화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 엄지와 중지로 동그랗게 만든 오른손을 들어 ‘이상 없음’을 신호”하는 정도이다. 마찬가지로 “주먹을 쥔 손을 들어 젊은 사내의 신호에 답”하는 정도이다. 그래서 그들의 목숨은 항상 위태롭고 관계도 불안정하다. 서로 다른 사람의 공기 줄을 쥐고 있기에 서로 생명의 보호자이기도 하지만, 언제든지 서로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나 암묵적인 적이기도 하다. 그들은 결국“손 감각 하나에 의지해”상대방의“목숨 줄을 조심스럽게 조금씩 바다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 것이다. 삶의 본성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깊은 바다 속의 수압으로 인한 잠수병도 머구리를 괴롭히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제대로 감압을 하지 않아 뼈가 썩어가는 괴사병으로 고생하면서도 변변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머구리의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p. 26)

서로가 쥐고 있는 생명의 줄은 상배방의 실수로 인해 엉망이 되기도 하지만 엉뚱한 이유로 끊어지거나 죽음의 줄로 변하기도 한다. “실제로 지나가는 배의 스크루에 공기 줄이 끊어져 머구리가 목숨을 잃는 사고도 종종 발생한다고 한다.”그래서 바다에서 일어나는 죽음은 그 가해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소설의 흥미를 끝까지 유지시켜주는 동식 아버지의 죽음의 비밀도 그래서 쉽게 밝혀지지 않는다. 타살일까? 사고일까? 사람들은 석구 아재를 끊임없이 의심하지만 진실은 다른 곳에 있다. 문제는 그 진실이 밝혀져도 누구도 가해자를 원망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생명의 위협 앞에서 다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거짓 절망하면서 다른 평범한 인간들과 혼동되지 않으려는 자들이 아니다. 철저하게 절망하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려하지만, 살면 살수록 더 이상 평범하지 않은 자들이 되고 더욱 더 절망하게 되는 자들이다. 이는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표현처럼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의 피곤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감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아름다운 것,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 뒤에 숨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