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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3 조회수 2509 작성자 편집팀 (rootgo@dreamwiz.com) 작성일 2003.03.25 제목 수미산 가는 길 <작품해설>

불륜과 참회의 미학 김 용 철의<수미산 가는 길> 유 창 근<문학박사/문학평론가/대학교 교수> 1. 컴퓨터와 전자공학의 발달로 인류문명은 전혀 새롭게 바뀌고 있다. 이 전자문명의 정보화 시대에는 작가가 아무리 천재적 상상력을 가지고 글을 쓴다해도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기상천외한 일들이나 쇼킹한 사건들에 대응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일부의 작가들이 외설적이거나 아주 파격적인 기법을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운 호기심이나 자극을 가하지만 정보화의 거대한 물결에 무디어진 독자들을 끌어당기려면 더욱 충격적이고 의외적인 경이로움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문학의 흐름은 한마디로 경이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경이의 발전은 19세기 초 낭만주의 운동이래 오늘날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주요한 문학운동의 특색이 되어왔다.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낭만주의에서 다시 사실주의로 그리고 현대의 의식의 흐름이나 포스트모더니즘 등으로 변천해 올 때마다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작품을 놓고 문학의 본질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고, 또한 그것은 고정, 기성관념 앞에서 전혀 새로운 경험, 혹은 놀라움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변화와 변천은 문학운동이나 문예사조의 흐름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한 작가의 작품경향이나 주제의식의 변화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경이를 체험할 수 있다. 솔직히 우리 문학사에서 1930년대 이상의 <날개>나 <오감도>의 낯설음은 그 좋은 본보기이지만, 이른바 어느 작가에게서나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비 문법성 혹은 의식의 전환이나 비약 등을 만나게 되면 독자들은 호기심과 당황을 동시에 갖게 되는 것이다. 2. 소설을 그 주제를 중심으로 두 가지 큰 영역으로 나누어 본다면 흔히 인간 본질의 탐구와 구원의 문학이랄 수 있는 순수문학과 현실(사회)고발, 저항, 개혁 등의 문학이랄 수 있는 참여문학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1965년 신춘문예 시로 당선, 이미 시인이었던 김용철은 1977년 <현대문학>을 통해 다시 소설가로 등단한 바 있는데 그는 시보다 소설에 보다 많은 기량과 열정을 보인 것으로 보아 그의 시는 논외로 하고 소설을 중심으로 작품경향을 살펴보면 위에 든 어느 한 쪽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발표한 60여 편의 장, 중, 단편들은 참여문학 쪽이기보다는 그가 주로 인간애(사랑), 구원(종교), 갈등과 화해, 가족(가정)문제 등을 즐겨 다룬 것으로 보아 대체로 순수문학을 지향해온 작가로 인식되어 왔다. 물론 최근에 김 용철은 어느 참여문학 작가 못지 않게 사회나 현실을 냉엄하게 고발, 비판한 작품도 발표한 바가 있다. 가령 ′98년 한국소설문학상 수상작이며 그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폭목(暴木)>은 6,25 동란의 비극을 바탕으로 한 참혹했던 동족상잔의 아픔을 우익적 힘의 논리를 넘어서 재조명한 분단문학이며,′94년 동국문학상 수상작인 <오르막 길>은 1990년대 초 대학 농촌봉사대와 공안당국의 첨예한 대치 상황 속에서 현장지도교수나 농활대장 어머니의 갈등과 곤욕 그리고 근본적인 사랑을 통하여 어둠과 고통의 암울했던 현실을 리얼하게 제시한 바 있다. 이런 작품 경향은 결코 김 용철을 순수문학의 작가라고만 속단하기에는 우리의 판단을 유보하게 한다. 그러나 가령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겨울 편지>,<누나의 시>,<물 마시는 도시>,<환상의 덫>,<바람의 얼굴>,<빈 집>등에 일관되게 흐르는 인간애와 가족적 갈등 그리고 화해 등의 주제의식은 아무래도 김 용철을 참여문학의 작가라기 보다는 순수문학의 작가로 보아옴이 더욱 타당하다 할 것이다. 3. 그러한 김 용철이 이 번에 쓴 장편 <수미산 가는 길>는 필자가 서두에서 거론한 것처럼 대단히 경이로운 쪽으로 변모한 경향이 짙게 느껴져 우리를 새삼 주목하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가 단순한 순수문학의 경지나 또는 시류에 영합하기 쉬운 참여문학의 경지도 아닌 파격적이며 의외적인 경향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인 의욕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수미산 가는 길>를 평가한다면 ‘종교적(불교)색채가 짙은 소설이면서 불륜과 외설을 엿볼 수 있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밑바탕에 중학교 교사인 여주인공의 커다란 두 개의 죄의식을 깔고 있다. 그 하나는 그녀가 어려서(일곱 살 때) 자신의 실수로 사촌 남자 동생을 우물에 빠뜨려 죽인 살인에 대한 죄의식이며 그 다른 하나는 그녀가 한 남자(교수)를 등산을 계기로 만나 진심으로 사랑한 나머지 불륜의 성관계를 맺어온 죄의식이 그것이다. 물론 그 남자는 관능적이고 물신적인 아내와 별 애정이 없는 가정생활을 영위해온 게 사실이지만 이 두 개의 운명적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던 그녀는 결국 교직도 버리고 연인도 돌려보낸 채 참회와 구원의 길을 떠난다. 그녀는 그 속죄의 방편을 불구 아동들을 돕는 사회봉사와 불교적 귀의에서 찾고 있다. 한편 교수이며 여주인공의 대학 선배인 남 주인공은 아내와의 정신적 괴리에서 학문이나 답사여행에 몰두하다가 새로운 인연으로 만난 청순하고 비극적인 여주인공과 불륜을 거듭하면서도 크게 후회하는 기색은 없지만, 자신의 가정이 빈 강정처럼 파괴되어가고 있는 징후는 누구보다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돈이 사람을 지배하고 여성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대등한 입장에서 부부의 쾌락과 부정(不貞)이 다반사로 가정을 파괴, 황폐화시키고 있는 실례를 그는 자신의 가정에서 스스로 발견, 체험하면서 다음과 같이 ‘떡가루 집안’이란 말을 섞어 한탄하고 있다. (이 무슨 해괴한 ‘떡가루 집안’의 집구석 꼴인가. 나는 나대로 유하와 놀아나고, 아내는 아내대로 송회장이란 작자하고 놀아난 게 분명하니 말이다. 남들이 보기엔 교수에 여사장에 부러울 게 없는 집이라지만 둘 다 내연의 관계나 갖고 서로 눈치나 보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히 사는 위선의 꼬락서니라니. 이게 정상적인 가정인가? 너 바람피웠으니 나도 바람 핀다. 글세 피장파장이요 오십 보 백 보라면 나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이것도 남녀평등이고 여권 신장이라면 이 얼마나 가소로운 현대판 비극이오 가면극인가.) 결국 여주인공의 죄의식은 참회를 낳고 남 주인공의 한탄은 후회에 몸 둘 바를 모른다. 불륜이나 사음을 저지르는 것은 성악(性惡)이지만 참회나 회한의 아픔을 겪는 것은 성선(性善)의 자각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이렇게 인간에게는 누구나 있을 법한 두 개의 얼굴, 즉 야누스적인 모습을 이 소설에서 두 주인공을 포함한 등장인물 거개의 의식이나 행동에서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형상화는 돈과 명성 혹은 지위와 애욕 때문에 위선과 이중인격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의 흔한 모습이며 굳이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만 우리가 과연 돌팔매를 던질 수 있는가를 반문케 한다. 아무튼 이 작품 전체에는 여주인공 유하의 죄의식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아픔을 지속적으로 각성케 한 작가의 의도는 인간은 누구나 생득적 혹은 후천적 원죄나 업장 때문에 괴로운 존재이며 이를 속죄할 수 있는 방편이 있다면 종교적 구원이나 인간적 봉사, 그리고 이타(利他)의 헌신으로 가능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아무리 죄업이 많은 사람이라도 새롭게 깨어나고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그리려고 한 점에서 김 용철의 지금까지의 어떤 작품보다 새로운 변모를 규지 할 수 있다 하겠다. 4. 김 용철의 소설은 재미있다. 그리고 그의 소설은 유익하다. 먼저 재미있다는 근거는 그의 소설이 잘 읽히고 그 내용이 구수하다는 점이다. 그의 소설은 대체로 솔직하다. 문장도 난해하거나 은유적이지 않은 대신 오히려 정확하고 때로는 시적이다. ‘ 유하는 다시 차창 밖을 응시했다. 거리에 허공에 흩날리는 눈 떨기. 그녀는 차라리 차분한 마음으로 사나운 벌레처럼 차 유리에 으깨지는 눈발을 보고 있었다. 산다는 것도 저렇게 정신 없이 덤벼들다가 망가지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떠나는 것도 새롭게 망가지는 어떤 방편은 아닐까. 하루살이만도 못하게 순식간에 부서지는 눈 떨기. <중략> 사람들은 천만년 살 것처럼 좋아하고 미워하며 울고불고 아등바등 하지만 차창 유리에 부딪치다 이내 바스러지고 마는 눈 떨기만도 못한 목숨이 아닌가. 그렇다면 풀잎에 이슬만도, 정말 스님의 말처럼 떠도는 구름만도 못한 인생이 아닌가.’ 주인공 유하가 갑사에 가면서 눈 내리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스스로 갖는 독백이다. 저자의 시적이며 명상적인 정서를 엿볼 수 있다. 그런가하면 소설 속의 이야기도 리얼하고 감칠맛이 있다. 요즘 흔히 인기에 영합하는 작가들의 소설을 보면 공연히 난삽하거나 감상적인 넋두리, 요상한 내적 자아, 그리고 장황한 심리적 독백 등 그 기법이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아리송하기만 한데 김 용철에게서는 거의 그런 작태나 억지가 없다. 그리고 그의 소설이 재미있다는 또 하나의 이유는 가령 남녀의 성관계 묘사도 아주 리얼하게 (눈치볼 것 없이)해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 번 작품 <수미산 가는 길>에서는 그동안 그의 다른 작품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묘사를 의도적으로 감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또한 변모라면 변모다. ‘다소 너무 했구나 싶은 속기(에로)도 없지 않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의 재미를 위한 조미(調味)의 역할이니 만큼 체(體)와 용(用)을 혼동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라고 그는 스스로 자신의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이는 그가 시도한 에로 혹은 외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의 재미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그것이 소설 자체의 목표(주제)는 아니라는 소신을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튼 소설은 우선 독자에게 잘 읽혀야 한다는 점에서, 소설이 잘 읽히려면 먼저 재미있어야하고 그렇게 재미있게 읽고 난 뒤에야 그 작품의 주제와 예술성을 논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소설이 잘 읽히고 재미있다는 것은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그의 소설이 유익하다는 점은 이 <수미산 가는 >서는 다음 두 가지 사례를 들 수 있다. 그 하나는 소설의 시적 구성이다. 이 작품에서는 매 장의 서두에 시를 한 편씩 (모두 9편) 인용하고 있는 특색을 볼 수 있다. 이는 다른 작가들에게서도 가끔 찾아볼 수 있는 기법이지만 그리 진부하게 느껴지지는 않고 오히려 시와 소설의 어떤 조화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허두에서 시를 감상하고 그 내용을 읽을 때, 독자들은 그 시적 이미지가 뇌리에 남아 소설 속에서 보다 승화된 심미적 정서적 감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시인이면서 소설가인 김 용철의 소설미학으로서는 그의 시적인 문장과 더불어 시를 좋아하는 독자도 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한 기법이라 할 것이다. 다만 시의 산문성도 문제지만 소설의 운문성, 즉 시적인 접근은 산문정신의 옹호를 위하여 자제해야할 과제라고 지적하고 싶다. 또 하나 유익한 점은 김 용철의 종교적(불교) 접근이다. 이 작품에서는 소요산의 자재암, 오대산의 지장암, 계룡산의 갑사, 태백산의 부석사 등 많은 사찰 순례가 나오며 고승의 일화, 불교적 담론, 그리고 현대 불교에서 불자들의 정신적 지표가 될만한 법문 등이 많이 나온다. ‘....원효스님이 말씀하신 <발심장(發心章)>을 소개하지요. 그 첫째가 사람은 누구나 입산 수도 하고자 하지만 쉽게 안 되는 것은 애욕에 사로잡힌 때문이다. 그 둘째가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또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이 몸은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 계(戒)가 없으면 마치 날개 없는 새가 자기 등에 거북을 업고 하늘을 날려는 어리석음과 같다. 넷째 공부와 실천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 같다. 그래서 공부하고 실천하면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한다. 그러니 모름지기 불자된 이는 애욕을 버리고 몸둥이의 한계를 알고 계를 지키며 공부와 실천을 병행하자 그 말이지요. 하하 허지만 괜찮아요. 그저 열에 여섯 일곱만 바르게 살고 나머지 셋 넷은 좀 모자라고 잘못 돼도 훌륭한 불자지요. 아 열에 열 다 완벽하면 저 부처자리에 앉아있지 왜 이렇게 우리가 중생노릇 합니까?’ 주인공 유하가 봉사하고 수도하러 간 초연암에서 초연스님이 원효스님의 불심을 그녀에게 전한 말이다. 비록 불교인끼리의 대화지만 우리네 속인에게도 유익한 내용이 아닌가. 현대인의 사랑은 짧고 가벼우며 자주 변하는 속성으로 치닫고 있다고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유하는 그러한 현대인의 얄팍하고 이악한 애정행각과는 다르게 자신이 찾은 사랑이 비록 불륜이기는 하나 진실한 사랑임을 깨닫고 길고 깊이 있고 변함 없이 책임과 신의를 지키려는 의지가 마지막 대목의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차디찬 흰 눈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 동백이 아름다운 것은 그 혹독한 추위를 이겨낸 의지와 맑은 심성 그리고 불타는 열정 때문이 아닐까. 2000년대의 문학(소설)은 그 주제나 소재가 다양해질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것이 중심주제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작가에 따라서는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면을 과감하게 드러냄으로써 독자의 양심이나 판단에 맡기는 방식을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추운 겨울 동백같이 사는 유하. 김 용철은 일단 대중 속으로 들어가 불륜과 불교를 통해 독자에게 많은 것을 묻고 있다. 불륜과 참회의 미학. 그러나 어느 작가든 즐겨 대중 속으로 들어가되 차원 높은 주제와 아름다운 예술성을 잃지 말아야 오래 남을 수 있다는 진리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