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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107 조회수 2091
작성자 뿌리출판사/편집팀 (bp1115@naver.com) 작성일 2021.09.07
제목 ‘거역(拒逆)’ / 사회학(일반)도서 / 저자 반길주 정치학 박사 / 프롤로그(prologue)

그들은 왜 거역을 선택하는가? 그들은 왜 거역을 하려 하지 않는가?

‘거역(拒逆)’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부조리와 부당함에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소소하게 시작한 ‘작은 거역’이 무시무시한 불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그래서 어찌 보면 ‘거역’은 참 부질없는 짓이다. ‘거역’의 대상이 단순한 ‘개인’이 아니고 힘이 막강한 ‘조직’이라도 치면 감당해야 할 고통의 불화살은 더 무시무시하다.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지나치게 합리적인 막강조직 앞에서 순수한 거역의 마음이 설 자리는 없다. 순수한 마음은 거대한 조직권력의 계산된 합리성에 곤두박질쳐진다. 강한 조직에 보잘것없는 개인이 감히 작은 저항이라도 하려는 낌새라도 보이면 그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려고 매섭게 달려든다. 처음에는 무조건 순종하도록 거역인을 길들이려 한다. 길들이는 수단은 압력행사와 인사상 불이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역의 뜻을 접지 않으면 거역인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응징한다. 거역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리 뛰어나게 일을 해왔던 사람도 순식간에 능력 없고 형편없는 사람으로 매도되어 폐기처분된다. 공익제보자는 사회건강을 위해 용기를 낸 ‘의인’으로 대우받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이익을 그르친 못돼먹은 ‘내부고발자’로 매도된다. 거역하려는 사람이 앞으로 닥칠 일에 아무리 단단히 각오하고 거역이라는 도전장을 던지더라도 막상 닥치고 나면 감당해야 할 대가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기에 혼비백산하고 만다.
‘거역’의 대상이 ‘리바이어던(성서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괴물로 홉스가 국가를 표현하기 위해 인용)’인 국가권력자라면 말할 나위 없이 그 사람의 미래는 온통 먹구름으로 휩싸이게 된다. 국가, 사회 그리고 공익을 위해서 사익을 내던지며 용기를 낸 ‘거역’이라는 목소리가 정치권력 앞에서 배신행위로 매도되어 매장된다. 그들의 목소리가 ‘직언’인지 ‘배신’인지는 국가권력자가 독단적으로 결정한다. 국가안위보다 ‘내편 권력’이 우선인 사람들에게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국가를 위한 길이 아니라고 그냥 단정 지어버린다. 거역인을 매장시키는 그들의 숨겨진 이유다. 작은 반대의 목소리라도 내면 그 권력의 수호자들이 솔선수범하여 달려들어 거역의 용기를 낸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고 결국에는 버림받도록 조장한다. 살아있는 권력은 반대편 사람을 내치는 일에는 대단히 열정적이고 매우 치밀하다. 그래서 권력자에게 건전한 조언이나 결기 있는 직언 따위란 발붙일 수 없다. 조언 따위는 모두 배신행위일 뿐이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직언을 하려다가는 모진 고통이 수반되는 가시밭길에 들어서고 만다.
집단사고에 빠져버린 권력에게 ‘내편 네편’의 경계는 명확하다. ‘진영논리’는 국가이익보다 중요하다. 아무리 ‘자기편’이었더라도 국익과 공익을 위해서 잠시 진심 어린 직언이라도 하면 그 순간 ‘남의 편’으로 전락되고 만다. 권력자와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내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처벌을 받게되는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사색을 멈추고 입을 닫아버린다. 생존본능이다. ‘정의’나 ‘능력’이 아닌 ‘진영’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이고 사람들은 이런 원리에 익숙하다. 따라서 합리적 계산에 밝은 사람이라면 ‘거역’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리적 계산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바로 거역인이 그 주인공이다. 우리들의 세상에는 ‘거역’을 통해 정의(Justice)를 찾고 신념을 지키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당시의 세상을 거역한 영웅이다. 닥칠 어려움을 알고도 결기 있게 거역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암흑 속에 그냥 내동댕이쳐지지 않는다.
거역인의 행동은 합리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거역은 자신의 이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의 이익을 버리는 행위다. 그렇기 때문에 도무지 합리적 판단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거역’을 하려는 것일까? 자신의 이익이 무참히 짓밟힐 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들은 왜 신념을 접지 않는 것일까? 한편 거역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행동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들이 거역을 정화의 계기로 삼는다면 개인이든 조직이든 아니면 국가든 간에 잘못된 길에서 하루라도 빨리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거역에 직면하면 귀를 닫아버리고 심지어는 거역인에게 입을 닫으라고 으름장까지 놓는다. 막강한 조직과 권력은 개인적인 손해를 감수해가며 공익을 위해 뛰어든 사람들을 멀리하려고 안달하며 심지어는 내치기까지 한다. 우리 세상은 왜 거역을 받아들일 포용심이 없는 것일까? 그들은 과연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이러한 퍼즐에 대한 해답을 추적하는 것은 ‘정의’를 살려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처절한 여정이다. ‘거역 담론’은 현재를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더욱 중요하다. 거역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거역의 포용도 점점 사라진다면 우리의 미래도 어두워질 것이 뻔하다. 이 세상에 거역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후세들에게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는 세상을 넘겨주게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이는 기성세대의 ‘직무유기’다. 거역은 사춘기의 무모한 반항이 아니다. 거역은 또한 기분 삼아 한번 저지르는 단순한 객기도 아니다. 거역은 이익을 챙기려는 계산적인 투쟁과도 거리가 멀다. 배신행위도 규칙위반도 물론 아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도 아니며 현실도피는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거역이란 무슨 존재일까? 거역이 무엇이기에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던져야 할 화두이어야만 할까? 거역은 정체된 동면상태와 현상유지적 관성을 거부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발전적 사고다. 따라서 거역정신은 개혁을 향한 발걸음의 시작이다. 거역은 또한 정의를 너무도 바라는 처절한 외침이다. 갑질 앞에 ‘굴복’ 대신 ‘저항’을 선택하고, 비리에 눈감지 않으며, ‘사익’을 위해 ‘공익’이 내동댕이쳐지는 엉터리 세상을 타파하려는 결기인 것이다. 거역은 아무리 강한 권력자라 하더라도 무조건 허리를 숙이고 복종의 표시로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고 당당히 할 말은 반드시 하고야 마는 정도(正道)의 길이다. 나아가 거역은 용기를 담은 절규다. 거역은 뼈아픈 고통을 수반하고 가시밭길을 예고하기에 단단한 용기 없이는 그 엔진에 시동조차 걸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거역은 희망이다. 거역은 반대와 비판만으로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 아니다. 거역을 통해 희망적 대안을 제시하며 함께 나아가려는 미래지향적 사고다. 부산스럽거나 시끄럽지 않지만, 강단 있게 목소리를 내는 ‘고요한 거역인(고거인)’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아끼고 소중히 생각한다. 고거인은 그들이 사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자부심도 매우 강하다. 그렇기에 국가와 사회가 퇴화되는 것을 먼 산 바라보듯 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거역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진화될 수 있도록 일부러 찾아 떠나는 고난의 길인 것이다.
이처럼 거역은 변화를 통해 희망을 찾는다.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한번 싸워보겠다는 저항의식이 사라진다면 세상에는 희망도 함께 사라지고 만다. 거역은 세상의 ‘악취’를 없애주는 정의의 ‘향기’다. 이 향기가 퍼져나가면서 세상에 밝은 희망도 피어난다. ‘비정상’을 정상화시키려는 노력들이 모여 희망의 구름이 만들어진다. 즉, 거역은 ‘비정상’에 대한 경고를 통해 세상의 ‘정상화’를 추구한다. 국민을 상대로 너무도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불법과 탈법을 덮으려고만 하는 행태가 난무하고 있다. 그들이 행한 잘못 때문에 비난을 받으면서도 너무도 떳떳해하는 파렴치한 모습에 세상은 곪아 터지고 있다. 거역은 세상의 이런 부조리를 뜯어고치고 말겠다는 외침이다. 거역은 정의를 내팽개치는 자들에 대한 작지만 힘 있는 울림이다.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은 바로 거역의 역사다. 부당함에 지친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거역을 논의했고 그들의 작고 고요한 논의는 역사상 가장 성숙한 정치체제인 자유민주주의라는 선물을 인류에게 안겨주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거역의 DNA를 잃어버리면 민주주의는 다시 퇴보하고 만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세력이 기득권화되어 ‘자기편 정치’에만 매몰되는 순간 그들이 간절히 원하던 민주주의는 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자만하여 방치하면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스스로 ‘방어기제’를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 민주주의 제도에서 ‘자유’라는 삶의 가치를 향유한 사람들이 이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민주주의 붕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부당한 세상에 직면해있으면서도 오로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는 방관적 자세로는 갇힌 세상의 문이 자동적으로 열릴 수 없다. 소위 ‘방어적 민주주의(Defensive democracy)’라는 방어기제도 사람의 관심과 노력이 없이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저항정신과 견제가 사라진다면 힘들게 이룩한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만다. 민주주의가 정착된 후에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얼마나 모진 고통을 통해 탄생되었는지 잘 모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 민주주의에 대한 소중함이 약할 수 있다. 그 정도면 다행이지만 자칫 이 세대가 민주주의를 지켜내려는 열정마저 없다면 정말 큰 일이다.
거역이라는 견제를 받지 않는 국가지도자는 독재자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마찬가지로 거역의 문화가 없다면 기업의 회장, 사장은 부당한 갑질의 대부로 전락할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또한 국가가 군인에게 부여해준 계급장을 국가적 소임을 다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고 사익을 위해 악용하는 것에 거역할 수 없는 군대문화는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직언이나 반대 목소리와 같은 거역이 가능한 문화를 만들어 군대의 사유화를 막아내는 기능이 제공되어야 한다.
최근 거역의 대상에 자주 회자되는 것 중 하나가 ‘갑질문제’다. 완장을 차고 있는 ‘갑’의 갑질은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힘이 있다고 마음대로 퍼붓는 말과 행동에 ‘을’은 상처를 받고 정신마저 황폐화된다. 그렇다고 ‘갑’의 갑질만 없어지면 갑질세상과 바로 작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완장을 차지 않은 사람도 갑질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을’의 갑질에 대해서도 경계하고 거역의 도전장을 던져야 한다. 승객이 버스기사를 폭행하고 손님이 직원에게 햄버거 봉지를 던지며 응급실에서 환자나 보호자가 의사나 간호사를 상대로 폭행하는 이상스러운 행동들은 모두 ‘을’의 갑질이다. 완장을 차고 있지 않은 사람, 즉 ‘을’이지만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잠시라도 완장을 차게 된 사람도 갑질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잠시라도 동면을 취하면 거역을 통해 해결되었던 것처럼 보였던 문제들이 바로 다시 부상하고 만다.
‘거역’이라는 말은 ‘부정적 이미지’가 아닌 ‘긍정적 메시지’로 탈바꿈되어야 한다. 거역을 보다 의연하게 할 수 있고 또한 이러한 거역을 포용할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지면 ‘내편 네편’이라는 이분법적 세상에서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다. 거역에 날개를 달아주어야 하는 이유다. 나아가 이런 자유로움은 세상의 발전을 견인해 줄 것이다. 거역은 우리의 세상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주는 순기능을 무척이나 많이 제공해줄 수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거역만 하면 우리의 세상이 자동으로 발전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책임감을 다해 자신의 역할에 매진해야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를 통해 국가가 더욱 튼튼해지고 모두를 위한 현실성 있는 정책들이 만들어져 사회적 균형이 유지되어야 우리의 세상이 발전할 수 있다.
하지만 각 구성원이 아무리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해도 ‘거역적 마인드’가 없다면 바로 경제, 사회 정책들이 사회의 특정사람들에게만 유리하도록 조작되어 결국 우리의 세상은 퇴보하고 만다. 정의로운 사람이 손해를 보고 정의롭지 않은 사람은 온갖 잔꾀를 동원해 이익을 보는 세상은 절망적이다. ‘위법’을 하지 않았다고 외치지만 사실 법망을 피해가며 ‘탈법’을 일삼은 사람들의 이중성에 공분하지 않는 세상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 ‘말’의 성찬으로 정의를 내세우면서도 ‘행동’으로는 정반대였던 ‘내로남불’이 점령한 세상도 암울하기는 마찬가지다.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세상은 참담하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땀보다는 정치와 계산에 밝은 사람은 쉽게 이익을 얻고 더 두꺼운 완장을 차는 세상도 처참하다. 이것은 세상의 진화가 아니라 퇴보다. 따라서 이런 퇴보를 막기 위해 ‘균형(Balance)’을 찾아줄, 나아가 ‘정상을 회복’시켜줄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바로 ‘거역’이 이런 메커니즘을 제공해줄 수 있다. 따라서 거역이 우리사회 발전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임에는 틀림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의사 이국종처럼 거역의 용기를 가진 사람들 덕분에 보다 투명해지고 맑아진다. 또한 기득권적 완장의식을 거역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뛰어든 가수 김장훈, 기업인 구본무, 참군인 채명신 같은 의인들 덕분에 희망의 빛줄기를 유지할 수 있다. 나아가 ‘고거인’ 덕분에 사회가 진화되고 자유가 지켜진다. 항상 베풀고 솔선수범하는 그들이 있으니 공공이익은 그들에게 맡겨두고 “나는 내 이익만 잘 챙기겠다”고 하는 것은 ‘무임승차(Free riding)’ 행위다. 남들이 군대에 가서 나라를 지킬 것이니 나는 어떻게해서든 병역면제를 받겠다는 사고와 별반 다르지 않다. ‘무임승차자’가 많아지면 밝아진 세상에 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된다. 거역적 마인드를 통해 조금이나마 이 세상에 밝은 빛을 주었더라도 무임승차자를 통제하지 않으면 다시 과거모습으로 회귀될 함정이 도사린다.
모두가 거역문화에 동참할 만큼 거역이 쉬운 것은 물론 아니다. 어찌 보면 쉽지 않기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어렵다고 ‘거역’을 외면하면 미래는 없다. 안타깝게도 아직 우리는 거역을 포용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 못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역에 무척이나 인색하다. 아니 거역에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내며 ‘고거인’을 몰아내려 한다. ‘직언’을 하면 그의 순수한 의도는 외면당한 채 바로 반대파라고 치부된다. 반면 ‘복종’은 큰 박수로 환영받으며 각종 포상이 뒤를 따른다. 우리 세상은 오직 “입에 쓴 약은 거부하고 달콤한 약”만 찾는 근시안적 사고로 둘러싸여 있다. 따라서 물질적 발전은 빠르지만 사회·문화적 발전은 더디다. 선진국다운 국민정서를 가꾸어나가기 위해서라도 ‘거역의 대중화’가 필요하다. 한국은 물질적 측면에서 보면 이미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 부유한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보다 한국의 인프라가 앞서가는 것들도 많다. 이제 ‘물질적 선진국’ 수준에 맞는 ‘가치적 선진국’인지에 대해 화두를 던질 때다. 과연 우리 사회가 선진의식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 부족한가? 이런 문제를 회피하려 한다면 옹골찬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것이 더디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일을 게을리한다면 선진국에 부합하는 수준의 사회적 정의도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거역을 하려는 사람이 없고 거역을 흔쾌히 포용하려는 사람도 없으면 밝은 미래도 없고 민주주의 발전도 없다. 거역문화가 정착되어 견제기능이 지속적으로 제공되지 않으면 갑질로부터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게 될 것이다. 공직자가 ‘공익’이 아닌 ‘사익’만 추구하려는 못된 시도도 방치되고 말 것이다. 나아가 ‘갑’의 갑질만 인식한 체 ‘을’의 갑질은 방치되어 세상의 발전이 더디게 될 것이다. 거꾸로 된 세상을 되돌리기 위해 거역문화를 형성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거역’의 문화가 형성되지 못하면 국가 내부적 문제만 곤경에 처하는 것도 아니다. ‘거역불가’ 마인드가 DNA에 녹아들면 갑질문제 등 국가 내부의 문제뿐만 아니라 국제관계에서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행태로 이어질 수 있다. ‘복종’이 만성화되어버리면 사대주의에 빠질 위험성도 크다. 중국이 온갖 외교적 갑질을 일삼고 심지어 해양주권침해 위협을 해도 ‘대국’이라 운운하며 맹목적으로 추종한다면 국가주권은 병들고 만다. 또한 사대주의적 환경에 매몰되어 미국에게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대칭적 동맹’으로 향한 발걸음은 시작도 못할 수 있다. 이처럼 ‘거역’의 화살은 국가 내부적 차원 말고도 주도적 국제관계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거역이 상대해야 할 대상은 이처럼 다양하다. 다양할 뿐만 아니라 거역이 맞서야 할 상대의 힘도 막강하다. 그렇다고 거역이 화려하거나 시끄러울 필요는 없다. 물리력을 앞세운 불법시위보다 때로는 조용한 일인시위를 통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시끄러운 거역보다 ‘고요한 거역’이 지속성도 있고 진정성도 더 크다. 비폭력적 촛불시위와 ‘미투운동’은 고요한 거역의 담대한 힘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직장, 학교, 군대에서 잘못된 것에 잘못되었다고 바른 목소리를 내는 것도 바로 고요한 거역의 한 사례다. 예를 들어 군대가 정치에 종속되어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경계에 실패하는데도 이를 방관하면서 아무 목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한다면 국가안보는 무너진다. 군대가 본래의 소명을 다하지 않는다면 거역의 항변을 통해 조직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에 동참하는 사람이 참군인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 군인의 사명에 대해 목소리를 낸다면 멋들어진 고요한 거역이 될 수 있다. 위선이 난무하는 세상을 보면서도 모른 체 한다면 위선에 대한 도덕적 기준이 낮아져 자기도 모르게 위선행렬에 동참하게 될 수도 있다. 위선에 거역의 시위를 당겨 스스로를 깨어있게 만들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세상은 그냥 내버려두면 부패, 위선, 부조리, 갑질, 불의에 휩싸일 운명에 처해있다. 이런 어두운 운명에서 세상을 구해 낼 힘이 거역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남의 일처럼 보였던 것도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절대 남의 일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 아무리 미미한 거역이라도 당신을 문제의식으로 무장시켜 항상 깨어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다. 당신이 깨어 있으면 우리의 세상도 밝은 불빛에 눈을 뜰 것이다. ‘불의’에 맞서 작은 목소리라도 내려는 노력이 모이고 모이면 우리의 세상은 균형점을 찾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역이 주는 희망이다. 작은 희망이라도 만들어내기 위해 거역의 향기를 함께 따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